용례 수는 이 사전에 수록된 예문의 수입니다. 당시의 실제 사용 빈도와 구분해 읽어 주세요.
굴비의 표기 연대표
표기의 변화와 공존
굴비의 표기를 세기별로 모았습니다. 같은 세기에 여러 표기가 함께 쓰이기도 했습니다. 연대표는 모든 문헌 뜻의 기록을 모으며, 연결된 용례는 문헌 영역에 표시된 뜻을 기준으로 읽습니다.
점: 기록 있음 —대시: 이 자료에 표시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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낱말 전체의 표기별 수록 시기. 각 행은 하나의 표기이며, 15세기부터 20세기까지의 기록을 보여 줍니다.
표기 · 근거
15세기
16세기
17세기
18세기
19세기
20세기
굴비19세기, 20세기사전 표기 요약
15세기—15세기 · 이 표의 근거 자료에 표시 없음
16세기—16세기 · 이 표의 근거 자료에 표시 없음
17세기—17세기 · 이 표의 근거 자료에 표시 없음
18세기—18세기 · 이 표의 근거 자료에 표시 없음
19세기
20세기
세기별 색은 모든 낱말과 영상에서 같습니다. 테두리와 점 안의 흰 표시는 선택한 세기를 나타냅니다.
연대표의 근거와 읽는 법
사전 표기 요약: 사전의 표기 변화 요약입니다.
문헌 수록 표기: 세기별 문헌에 함께 실린 표기를 더한 것입니다.
점이 없는 시기에도 이 말이 쓰였을 수 있습니다. 표시된 세기는 자료에 기록이 남은 시기로, 낱말이 생기거나 사라진 때와는 구분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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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별 주요 표기 모아보기 1종
사전의 표기 요약과 문헌 수록 표기를 모았습니다. ‘현재’는 오늘의 표제어이며 역사 세기와 구분합니다.
굴비
19세기20세기현재
원자료의 전체 표기 목록 1종
굴비
굴비의 어원과 변화
이 말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사전의 어원·변화 설명소제목은 읽기를 위한 편집 안내
옛 표기와 변화
‘굴비’는 19세기부터 나타나 현재까지 이어진다.
굴비에 관한 주석
조기를 말리기 위해 몸통을 짚으로 엮어서 매달아 놓으면 조기의 허리가 서서히 구부러지는데 이 모습에서 ‘구비(仇非)’라고 불렀고 여기서 ‘굴비’가 나왔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 즉 굽었다는 모습을 형용하기 위해 ‘구비(仇非)’가 쓰였다는 것이다.
굴비의 보충 설명
‘굴비’는 한자를 빌려서 표기한 ‘仇乙非(구을비)’로 문헌에서 먼저 나타난다. 유희춘의 ≪미암일기(眉巖日記)≫권1 12월 초6일, 오희문의 ≪쇄미록(瑣尾錄)≫권4 4월 13일 일기에 ‘仇乙非’가 나타난다. 이후 헌종 12년~숙종 23년(1671∼1697)에 간행된 ≪천신진상등록(薦新進上謄錄)≫과 조선 영조 연간에, 왕명으로 각 읍에서 편찬한 읍지를 모아 편찬한 ≪여지도서(輿地圖書)≫에서도 ‘仇乙非’가 나타난다. ≪여지도서≫에서는 ‘(仇+乙)非’, ‘屈非(굴비)’와 ‘仇非(구비)’도 나타나는데, 주로 ‘石魚’, ‘石首魚’와 병기되어 나타난다. ‘仇乙非’는 ‘굴비’의 음을 나타냈을 것으로 추정되고 이를 달리 표기한 것이 ‘(仇+乙)非’이다. ‘(仇+乙)非’의 ‘(仇+乙, 위아래로 합침)’는 ‘굴’ 소리를 나타내기 위하여 우리나라에서 만든 한자로 ‘乙’은 음절의 받침을 나타내기 위해 들어갔다. ‘仇乙’과 ‘屈’이 관련됨을 보여주는 예가 ≪삼국사기≫에 보인다. ≪삼국사기≫‘잡지 제6’에 나오는 고구려 지명 표기가 그것으로, ‘구을현(仇乙峴)’을 ‘굴천(屈迁)’이라고 한다는 기록이 나온다. ##‘굴비’는 고려 전기의 문신인 이자겸(李資謙)과 관련된 이야기로도 유명하다. 법성포로 귀양을 온 이자겸이 비굴하게 살지 않겠다는 의지를 나타내기 위해, 그 맛이 변하지 않는 영광 굴비를 임금께 진상하면서 ‘비굴(卑屈)’의 글자를 바꾸어 ‘굴비(屈非)’로 하였다는 이야기이다. 이 설을 ‘屈非’라는 형태가 문헌에서 확인된 시기와 관련하여 해석하는 견해가 있다. ‘屈非’가 ≪여지도서≫의 영광현에 처음 등장하고 이후 ≪고부군읍지(古阜郡邑誌)≫(현 정읍)에서 등장하며 확산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여지도서≫ 중 (1871년)에서는 일관되게 ‘仇乙非’라고 적었는데 (1895년)에서는 모두 ‘屈非’로 적었다고 한다. 즉 ≪여지도서≫에 나오는 표기들을 살펴보면 18세기에 영광에서 시작된 ‘굴비’와 관련된 이야기가 19세기 초반과 중엽을 지나며 전라도 일대에 퍼지고 20세기가 시작할 때에 충청도까지 확산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자겸과 관련된 설이 조기잡이 어부들이 이야기꾼의 역할을 하면서 조기떼의 북상과 함께 퍼지게 되었을 가능성도 있다고 한다.##‘말린 조기 또는 마른 조기’에 대한 기록은 고려시대부터 확인된다. 고려 말의 학자 이색이 쓴 ≪목은집≫에는 謝子復以法酒,乾石首魚見饋([현대어 역] 자복(子復)이 법주(法酒)와 말린 석수어(石首魚)를 대접해 준 데 대하여 사례하다.)라는 구절에서 ‘건석수어(乾石首魚)’가 보인다. ‘석수어’는 ‘조기’의 한자어이므로 ‘건석수어’는 ‘말린 조기 또는 마른 ’라는 뜻이다. 15세기 문헌인 ≪훈몽자회≫의 ‘鮝 ᄆᆞᄅᆞᆫ 조긔 샤ᇰ’과 17세기 문헌인 ≪언해두창집요≫의 ‘石首魚 ᄆᆞᄅᆞᆫ 조긔과’에서도 마른 조기를 가리키는 표현이 나타난다. 다만, 여기의 ‘마른 조기’가 소금에 절여 말린 조기인 ‘굴비’와 같은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다.